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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리 오카와치야마 350년, 비밀의 도자기 마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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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 여행을 준비하면서 유명한 온천이나 후쿠오카 시내 말고, 진짜 그 지역 사람들이 지켜온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에게는 그게 사가현 이마리였다. 최근 몇 년 사이 규슈 지방자치단체들이 전통 공예 마을을 관광 자원으로 다시 조명하면서, 도자기 애호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만한 곳들이 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카와치야마는 유독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단순히 그릇을 파는 마을이 아니라, 한때 외부인의 출입 자체가 막혀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마을이 왜 그렇게까지 철저히 숨겨져야 했는지, 그리고 실제로 걸어본 골목과 가게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함께 정리해보려 한다.

마을에 들어서기 전, 근처 식당에서 두툼한 돈카츠 정식으로 먼저 배를 채웠다. 그릇 하나까지도 이 지역 도자기 느낌이 나서 여행의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산길을 따라 조금 달리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 산골짜기가 통째로 비밀이었을까

오카와치야마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사가번, 즉 나베시마 가문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편에 섰던 나베시마 가문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처지였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고급 자기를 만들어 쇼군 가문에 바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자기를 사들여 헌상했지만,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산 수입이 어려워지자 아예 자체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게 나베시마야키인데, 처음에는 아리타의 이와야가와치에서 굽다가 이마리야키의 해외 수출이 활발해지면서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오카와치야마로 가마를 옮겼다는 내용을 이마리나베시마야키협동조합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이 참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좋은 흙이나 물 때문에 자리를 고른 게 아니라, 기술을 지키기 위한 지형적 요새로서 이 골짜기를 선택했다는 점 말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관소 자리 기념물에는 파란 물결무늬 타일과 함께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가 세워져 있어서, 이곳이 예사 마을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려주는 듯했다.

실제로 마을 입구에는 관소, 그러니까 일종의 검문소가 있었고 이곳을 통해서만 사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사가번은 품질 관리에도 지독할 정도로 엄격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실패작은 전부 깨뜨려 없앴다는 이야기를 이마리시 관광협회의 산책 코스 소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상해보면 좀 서늘하기도 하다. 도공들은 평생 이 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최고급 헌상품만을 만들었다는 뜻이니까. 이런 폐쇄적인 체제가 메이지 시대에 번의 가마가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고, 그래서 지금도 이곳은 히요노사토, 우리말로 옮기면 ‘숨겨진 가마의 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마을에 들어서면 만나는 물레방아와 도자기 항아리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말 세밀한 매화와 모란 문양이 그려진 실제 도자기 작품이라 살짝 놀랐다.

골짜기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강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나무 물레방아, 이른바 가라우스 오두막을 볼 수 있다. 에도 시대에는 이 물레방아로 도석을 빻아 나베시마 청자의 원료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재현된 시설이지만 나무 기둥과 돌절구의 질감만으로도 당시 작업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계곡물 소리와 함께 가게마다 걸어둔 도자기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섞여 들려온다.

골목 가게마다 다른 세 가지 양식

대략 서른 곳 남짓한 가마가 지금도 이 마을에 모여 있는데, 걸어 다니다 보면 가게마다 색깔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낀다. 흰 바탕에 파란 염색 문양만 들어간 소메츠케 계열, 붉고 노란 색이 화려하게 올라간 이로나베시마 계열, 그리고 은은한 청록빛의 나베시마 세이지 계열이 대표적인데, 한 가게 안에서도 이 세 갈래가 나란히 진열된 모습을 보는 재미가 크다.

문삼요 계열 가게에서는 붉은 물감을 붓으로 휘두른 듯한 현대적인 디자인의 찻잔과 접시들도 눈에 띄어서, 전통과 요즘 감각이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벽에 걸린 커다란 도자기 타일 벽화도 눈길을 끈다. 파란 물결무늬 위에 산과 마을 풍경이 그려진 그림인데, 이 마을 자체의 역사를 담아낸 작품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청산요라는 가게 앞에서는 작은 골목길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는데, 나무 진열장 안에 놓인 파란 찻잔 세트 가격표를 보고 살짝 눈이 커졌다.

손으로 그린 문양 하나하나가 다르다 보니 같은 종류라도 가격 차이가 꽤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무늬가 화려한 것보다 은은한 청색 한 가지로만 그려진 잔이 더 오래 써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서 눈여겨봤다.

가게 앞 골목에는 남색 천을 씌운 테이블마다 접시와 찻잔이 가득 늘어서 있어서, 마치 노천 갤러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지금 가면 어떤 점이 좋을까

솔직히 말하면 오카와치야마는 화려한 대형 관광지는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좁은 골목, 산에 둘러싸인 지형, 가게마다 걸린 손글씨 간판까지, 관광지용으로 새로 꾸민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3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자기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왜 이 골짜기가 그토록 철저하게 숨겨져야 했는지를 알고 나서 걸으면 골목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인다. 다만 대중교통이 넉넉한 편은 아니라서, 이마리역에서 차로 이동하거나 사전에 버스 시간을 확인해두는 편이 마음 편하다.

[별첨] 조선 도공 이삼평과 이마리 도자기, 그 뒤에 숨은 이야기

본문에서 다룬 오카와치야마의 나베시마야키는 사실 그보다 조금 앞서 시작된 또 다른 이야기와 뿌리가 닿아 있다. 바로 아리타 자기, 즉 넓게는 이마리야키라 불리는 도자기 전통을 처음 열었다고 전해지는 조선인 도공 이삼평(李參平)의 이야기다.

이삼평은 누구인가

이삼평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1598년 사이, 사가번 초대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부대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중 한 명이다. 정확한 출신지나 조선에서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일본 쪽 문서에 남은 성씨 ‘가네가에(金ヶ江)’가 금강(錦江)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오늘날에는 충청남도 공주 지역 출신으로 추정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다(참고: 한국어 위키백과 ‘이삼평’). ‘이삼평’이라는 이름 자체도 사실은 조선에서 쓰던 본명이 아니라, 일본식 이름 ‘산베에(三兵衛)’를 후대에 한국식으로 역추정해 붙인 것이라는 점이 이 인물을 둘러싼 기록의 공백을 잘 보여준다.

일본으로 끌려간 뒤 이삼평은 사가번 영지 내를 돌아다니며 자기 원료가 될 만한 흙을 찾다가, 1616년 무렵 아리타 동쪽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 광맥을 발견한다. 그는 이곳에 덴구다니 가마를 짓고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구워냈다고 전해지며, 이 사건이 곧 아리타 자기, 나아가 이마리 자기 산업 전체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삼평’). 아리타에서 만들어진 그릇들은 인근에 항구가 없어, 가까운 이마리 항을 통해 일본 각지와 유럽으로 실려 나갔고, 그래서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이 도자기를 아리타가 아니라 ‘이마리(Imari)’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앞서 소개한 오카와치야마의 나베시마 번요 역시 이 흐름과 이어져 있다. 기술의 뿌리는 이삼평이 열었고, 그 기술이 번의 통제 아래 최고급 헌상품으로 완성된 곳이 오카와치야마였던 셈이다.

화려한 도자기 이면의 슬픈 역사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과정은 자발적인 이주가 아니라 전쟁 포로로서의 강제 연행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서부·공예부·포로부 등 별도 부대까지 편성해 조선의 문물과 기술자들을 조직적으로 약탈해갔고, 이 때문에 이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시각도 있다(참고: 시민의소리, ‘아리타의 도조 이삼평’). 이삼평과 함께 끌려간 도공만 150명이 넘는다고 전해지며, 아리타 외에도 가고시마의 심당길처럼 규슈 각지에 흩어져 각 지역 도자기 문화의 시조가 된 조선인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남은 삶을 보내야 했다. 이삼평의 경우 일본에서는 훗날 ‘도조(陶祖)’로 추앙받아 신사에 신격화되어 모셔지고, 아리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그의 기념비까지 세워졌다. 겉으로 보면 대단한 영예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이면에는 고향과 가족, 조선에서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긴 한 사람의 개인사가 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의 진짜 이름조차 확실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이 역사가 얼마나 철저히 조선 쪽의 기록에서 지워졌는지를 보여준다.

1990년, 이삼평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 양국이 함께 세운 기념비가 들어섰다. 늦었지만 국경을 넘어 이 역사를 함께 마주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오카와치야마의 아름다운 청화백자와 이로나베시마를 바라보며, 그 기술의 뿌리 한쪽에 전쟁 통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손과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려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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